2021. 2. 9. 18:52ㆍ과거의 이야기
임진왜란 발발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만 대군을 이끌고 군대를 3개로 나누어 조선을 기습 공격합니다.
부산과 동래가 순식간에 점령당하고 당황한 조선군은 도미노처럼 줄줄이 패전을 거듭하게 되고
결국 왜란 발발 20일 만에 한양이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일본의 칩입에 대한 소식은 음력 4월 15일 전라좌수영에 전달되었고,
음력 5월 4일 첫 함대를 출격시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전술의 핵심은 '전투의 우위성을 선점한다' 입니다.
언제나 전투에서 수적, 화력의 우위를 준비한 다음 전투에 나섰으며,
어쩔 수 없이 전력이 대등 또는 열세인 상황이라면 첩보, 전술, 지형 등 가능한
모든 이점을 총동원해서 아군의 피해는 최소로, 적의 피해는 최대로, 전투 시간은 최단으로,
상대의 피해는 최장으로 전투에 임했습니다.
옥포 해전
1592년 (선조 25) 5월 7일 옥포(지금의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만에서
토도 타카토라의 선단과 마주하여 왜선 26척을 침몰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적진포(통영)에서
왜선 13척, 합포(마산)에 들러 왜선 5척을 궤멸시킵니다.

이 전투로 조선군 피해는 0척, 부상 2명이며,
일본군 피해는 44척, 6,920명이 전사했습니다.
이로써 가선대부(종 2품)로 승진합니다.
사천 해전
5월 29일 거북선을 포함해 전선 23척을 이끌고 본영(여수)을 출발하여 노량 앞바다에 이르러
전선 3척을 끌고 온 원균과 합세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한 거북선이었습니다.

때마침 밀려드는 조수를 계기로 선두에 철갑으로 무장한 거북선을 돌격시켰으며,
이에 왜군은 혼비백산하여 처절하게 격침당합니다.
이 전투로 나대용과 이설이 화살에 맞아 부상당했으며, 이순신도 왼쪽 어깨에 철환을 맞았습니다.
이 전투는 6월 1일 아침까지 교전을 이어갔습니다.
이 전투로 조선군 피해는 0척, 부상자 3명, 전사자는 없으며,
일본군 피해는 13척, 2,600명이 전사하였습니다.
당포 해전
6월 2일 척후선으로부터 당포 선창에 왜선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출진을 해
왜장 구루시마 미치유키의 함대 21척을 전멸시키고 왜장 구루시마는 전사합니다.

당포 해전 승리 후 다시 척후선을 사방에 보내 왜선들이 당항포, 율포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포착한 충무공은
6월 5일 곧바로 출격하여 당항포에서 39척, 율포에서 7척을 격침시킵니다.
이들 전투로 조선군 피해는 0척, 11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며,
일본군 피해는 당포, 당항포, 율포 합쳐서 67척, 8,140명이 전사했습니다.
엄청난 승전을 거듭하며 당당하게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했고 이 공으로
8월 16일 자헌대부(정 2품) 승자를 하사 받습니다.
한산도 대첩
1592년 (선조 25) 7월 8일 일본은 육지와 달리 바다에서 거듭 패하자 병력과 함선을 한데 모아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로 합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대장으로 하여 왜선 73척과 수군 1만 명이 가덕도로 접근해 육군과 연계를 하게 됩니다.
이에 충무공은 많은 수의 적군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순신 장군이 정한 전투지는 바로 '한산도'
한산도는 수비하는 조선군 입장에서는 위급 상황 시 뒤로 빠져나가기 쉽고 일본군이 상륙한다 하더라도
민가가 없어 굶어 죽기 좋은 지형입니다.
이 한산도 좌우측 섬들 사이에 경상 우수군, 전라 우수군을 복병으로 숨겨두고
일본군을 유인하여 이순신 장군은 직접 전라 좌수군 함대를 이끌고 적과 맞섭니다.
조선의 선봉 함대가 자신들보다 적다는 것을 눈치챈 왜장은 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이때 선봉 함대가 취하고 있던 진형은 일자진으로 측방이 취약한 진형이었는데요,
이를 노리고 와키자카는 숫적 열세와 측방 압박을 노리고 선봉 함대를 공격합니다.


몰아치는 일본군을 피해 도망치던 이순신 함대가 갑자기 정지하고 함대를 선회시켜 방향을 전환하고
커다란 원형의 학익진을 펼칩니다.
하지만 와키자카는 계속 돌격을 명했는데, 이유인즉슨 아직 조선의 함대가 숫적 열세며,
해전에서 이러한 원형 학익진을 사용한 전례가 없었기에 자신이 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겁니다.
그 순간 좌우 양익에 매복하고 있던 경상 우수군, 전라 우수군의 수군들이 정면으로 쫓아오던 일본 함대의 좌우 양익을 포위하게 해 오로지 뒤로만 빠질 수 있는 형국이 돼버립니다.
그리고 조선군 함대의 일제 포격이 시작되고, 뒤늦게 깨달은 일본군은 전장에서 도망치려 하지만 이미 학익진에 포위돼 버린 터라 도망도 치지 못하게 그 자리에서 궤멸이 됩니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 함대 73척 중 70척을 궤멸하고 1만 명의 수군 중 생존지는 와키자카 포함 400명 남짓이었습니다.
이들은 13일간 미역으로 연명하다가 소수만이 겨우 탈출했다고 합니다.
한산도 해전의 최종 결과 조선군 피해는 0척, 19명 전사, 116명이 부상당했으며,
일본군 피해는 59척 격침, 14척 나포, 9,600명 전사, 300명은 아사를 했습니다.
이 전투로 인해 일본군은 해상을 장악을 포기하고 본래 계획인 해상 보급 작전도 실패를 하게 됐으며,
또한 평안도까지 올라간 고니시의 군대가 남하해야 했고 조선의 육군도 재정비할 시간을 벌게 됐습니다.
전쟁의 흐름을 단번에 바꿔놓은 전투로 임진왜란 3대 대첩인 한산도 대첩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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