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29. 14:43ㆍ과거의 이야기
파직, 복직
1582년(선조 15년) 1월 군기 경차관으로 온 서익이 지난 일에 앙심을 품고 근무태만이라는 거짓 상소를 올려
18개월 만에 첫 파직이 되지만 5월 다시 훈련원 봉사(종 8품) 직에 복직이 됩니다.
1583년 7월 전라좌수사로 있던 이용이 함경도로 전근을 가며 이순신을 지목해서 군관으로 삼은 뒤
건원보 권관으로 천거를 하게 됩니다.
건원보는 함경도 경원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으로써 당시 여진족이 침략과 약탈이 많았던 곳으로
이때 복병을 써 여진족 추장 우을기내를 생포하게 됩니다.
이런 전적으로 조정에서는 상을 내리고자 했으나 상관인 북병사(병마절도사:종 2품) 김우서는 자신과 논의 없이 독단으로 작전을 수행했다는 장계를 올려 포상은 취소됐지만, 동년 11월에 훈련원 참군(종 7품)으로 승진을 하게 됩니다.
울지내 생포 다음날 부친인 정이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지만 부고는 다음 해인 1584년 1월에 전해지고,
그 후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3년상을 치르게 됩니다.
백의종군
거듭되는 여진의 침략과 약탈로 인해 조정에서는 그를 기용하기 위해 상중에도 탈상 시기를 여러 번 물어왔다고 합니다.
탈상 후(1586년 1월) 궁중의 말과 수레에 관한 일을 담당하는 사복시 주부(종 6품)에 임명된 뒤
16일 만에 함경도 경흥의 조산보 만호(종 4품)로 승진하게 되고 함경도 관찰사(종 2품) 정언신의 추천으로
녹둔도(조산보에서 동쪽으로 20리 떨어짐) 둔전관을 겸임하게 됩니다.
(둔전은 군사 요지에 설치하여 군량을 충당하는 토지)
당시 녹둔도를 지키는 병력이 부족하여 함경도 북병사(병마절도사:종 2품) 이일에게 군사를 증원시켜 줄 것을 거듭 요청했지만 이를 들어주지 않자 주둔지 외곽에 목책을 쌓는 등의 준비를 합니다.
그해 가을은 풍년이 들어 경흥 부사((종 3품) 이경록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녹둔도로 가 추수를 할 때
여진족의 갑청아, 사송아등이 기병 1,000 여기를 이끌고 공격을 해 옵니다.
당시 주둔지에는 10여 명의 병사들만이 있었으며 나머지 병사와 백성들은 추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달려오는 적들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활을 날리니 적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고
이운룡과 함께 뒤를 쫓아 포로로 잡힌 백성 60여 명을 구해냅니다.
이에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올까 두려웠던 이일은 아군의 피해만을 장계에 올리게 됩니다.
'적호가 녹둔도의 목책을 포위했을 때 경흥 부사 이경록과 조산 만호 이순신이 군기를 그르쳐 전사 10여 명이 피살되고 1백6명의 인명과 15 필의 말이 잡혀갔습니다. 국가에 욕을 끼쳤으므로 이경록 등을 수금하였습니다.'
(선조실록 1587년 10월 10일)
하지만 조정은 녹둔도가 야인 지역과 너무 가까워 애초에 소수의 병력으로 지킬 수 없는 곳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며
선조는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로 하여금 장형을 집행한 뒤 백의종군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선조실록 1587년 10월 16일)고 명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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